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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부정공>송계공휘정국묘갈명(松溪公諱廷國墓碣銘)
松溪公諱廷國墓碣銘 松溪趙公諱廷國字忠汝其先玉川人上世有諱璋高麗檢校門下侍中自是世襲簪組至諱元吉策勳大匡輔國玉川府院君諡忠獻號農隱生諱瑜麗社屋罔僕自靖我 世宗朝特命 旌閭屢傳而諱爾重武科官至統制使際遇肅廟最承恩渥策衛社勳辛壬四大臣被禍同爲權奸所誣竟被追奪籍沒 英祖乙巳同死諸公伸雪復官至孫斗臣以辛壬禍家嗣孫特命入侍除五衛將下 贈玉圈貝纓以寵之異數也於公爲高祖曾祖諱亨溥通德郞祖諱秉禧考諱聖烈妣濟州梁氏慶州金氏公金氏出也生于憲宗己酉十二月二十二日幼而至性天植自能愛敬甚得父母歡心稍長怡愉親側色養承順家窶甚菽水屢空而甘旨之供未嘗闕乏以至負米漁樵之事一如古人之爲歲丙子嚴君得患重病數月委席公憂形於色衣不解帶尋醫問藥不遑暇食夜則視天願代竟遭大故拚擗號痛如不欲生襲歛纔迄母夫人又靡寧不得巳而殯塗于家後稍間地晨夕絰帶往哭揮淚草枯一夕暴雨驟至不辨咫尺怱有大虎引路至門至誠感物即此可見朞悲哀三年憂鄕里老少一口稱孝子云母夫人金氏以痿痺之症八年床褥臥起須人公湯藥前粥不使人代之雖在外執業必及時還家奉進食飮未嘗或曠迨遭憂執禮如前喪每喪餘一如袒括祭需極其齊潔盖其素性然也沒于四月二十日生卒皆己酉葬在順天住巖面住洞南麓癸坐配漆原尹氏孝事舊姑敬承君子墓雙塋擧三男長曰相鉉承襲庭訓以孝友聞次曰汶鉉季曰奉鉉長房一男淵澈出系英鉉次房一男淵默季房一男淵瀷嗚呼余觀世之言孝者大抵以氷鯉雪筍靈感異跡亂其眞欲先顯揚而反誣其實可乎今觀此狀衣服飮食必殫誠生死葬祭無違禮供爲子職而己鄕人之公評也如是道儒之推薦也如是此足以徵信於今與後也公之族後孫東植恐其沉泯屬余爲銘余老且病不堪把筆趙友淵吉書以勗之不忍終辭銘曰孝源百行公實無愧養兼志躰禮以葬祭曷以爲然獨全民彝余懼沉泯揭此銘辭 錦城 吳駿善 撰 송계공휘정국묘갈명(松溪公諱廷國墓碣銘) 송계(松溪) 조공(趙公)의 휘는 정국(廷國), 자(字)는 충여(忠汝)이다. 그 선조(先祖)는 옥천인(玉川人)이며 시조 휘 장(璋)이 고려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을 지냈는데 그뒤로 계속 벼슬을 이어 왔다. 원길(元吉)때 와서는 나라에 공로가 있어 대광보국(大匡輔國)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시(諡) 충헌(忠獻)을 받았는데 호(號)는 농은(農隱)이었으며 아들 유(瑜)는 고려가 망하자 벼슬길에 나가지 않으니 세종(世宗)때 조정에서 특별히 정려(旌閭)를 내렸다. 여러번 전하여 이중(爾重)은 무과(武科)에 올라 통제사(統制使)가 되었는데 때마침 숙종(肅宗)의 깊은 총은을 입어 위사훈을 받았으나 신임(辛壬) 四대신(四大臣)이 화를 당할 때 간신 배들의 모함을 입어 추탈(追奪) 적몰(籍沒) 되었다가 영조(英宗) 을사년에 그 일에 죽은 제공과 같이 설원(雪冤)하고 복관(復官)하였다 그의 손자 두신(斗臣)은 신임화를 당한 자손이라 하여 입시(入侍)를 특명(特命)하고 오위장(五衛將)을 제수하며, 옥권패령(玉圈貝纓)까지 내려 총애하였는데 이는 공의 고조이다. 증조 형부(亨博)는 통덕랑(通德郎)이요 조는 병회(秉禧) 고(考)는 성렬(聖烈)이며 비(妣)는 제주 양씨(濟州梁氏)와 경주 김씨(慶州金氏)인데 공은 김씨가 낳았다. 헌종(憲宗) 기유(一八四九)년 十二월 二十二일에 태어난 공은 지극한 천성으로 어려서부터 스스로 애경(愛敬)할줄 알아 부모의 환심을 얻었고 점점 장성해 감에 따라 부모 곁에서는 언제나 환한 얼굴을 하고서 뜻을 잘 받들며, 집이 가난하여 끼니를 거를 때가 많아도 부모 봉양 만큼은 궐(關)하지 않았으며 부미어초(負米漁樵)하는 일도 한결같이 옛 사람이 했던 것처럼 하였다. 병자년에 부친이 병을 얻어 여러달 자리에 누우니, 근심스러운 빛을 감추지 못하며 옷띄도 풀지 않고 의원을 찾아다니며, 약을 묻느라고 먹을 겨를도 없었다. 밤이면 자기 몸으로 대신하게 해줄 것을 하늘에 빌기도 했지만 끝내 상을 당하고 말자 땅을 치며 울부짓는 모습이 살고 싶은 생각이 없는 듯했다. 염습(歛襲)을 겨우 마치고 나니 모부인(母夫人)이 또 편안치 못하여 하는 수 없이 집뒤 적당한 곳에다 빈소를 두고 밤 새벽으로 수요질(首腰絰)을 두루고 가서 哭을 하곤 하였는데 그 흐르는 눈물이 풀을 마르게 하였다. 하루는 별안간 폭우가 쏟아져 지척을 분간 할 수 없었는데 커다란 호랑이가 나타나 공을 인도하여 그의 문앞에까지 바래다 주었다하니 성의가 지극하면 외물을 감동시킨다는 사실을 여기에서 볼수 있겠다. 一년동안 비애(悲哀)로 날을 보내고 三년동안 근심어린 모습으로 세월을 보내니 향리노소(鄕里老少)가 입을모와 효자라고 말을 하였다. 모부인(母夫人) 김씨(金氏)가 중풍으로 八년동안 자리에 누워 고생할 때 공은 탕약전죽(湯蔡煎粥)을 남에게 시키지 않고, 직접 하였으며 밖에 나가 일을 보다가도 때가 되면 반드시 돌아와 식음(食飮)을 보살폈으며 상을 당한 뒤에는 부친(父親)상과 같이 예에 맞게 상을 치루었으며 탈상후에도 초상때 처럼 제수(祭需)를 청결하게 하니 그의 본성이 그러했던 것이다. 기유(己酉)년에 태어나 그다음 기유년 四월 二十일에 세상을 떳는데 순천(順天) 주암면(住巖面) 주동(住洞) 남쪽 산줄기 계좌(癸坐)에 장사하였다. 부인은 칠원 윤씨(漆原尹氏)인데 시부모를 잘 모셨으며 남편에게 공경하였다. 묘는 쌍봉이다. 三남을 두었는데 장남 상현(相鉉)은 가훈(家訓)을 이어받아 효우(孝友)로 알려졌다. 다음은 문현(汶鉉)·봉현(奉炫)이다. 장방(長房)의 一남은 연철(淵澈)인데 영현(英鉉)에게 양자가고 차방(次房)의 一남은 연묵(淵默)이며 계방(季房)의 一男은 연익(淵瀷)이다. 아! 세상에 효도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빙리설순(氷鯉雪筍)과 영감이적(靈感異跡)을 들어 그 진실을 어지럽게 하고 있다. 그 이름을 세상에 알리기 위하여 그 진실을 속여야 되겠는가? 이제 이 행장(行狀)을 보니 공은 의복음식에 성의(誠意)를 다하였고 생사장제(生死葬祭)에 예(禮)를 어기지 않았으며, 생전에 자식된 도리를 다했을 뿐이라 한다. 고을 사람들의 평론이 이와 같고 덕망있는 선비들의 추천(推薦)이 이러하니, 이 사실은 참으로 오늘날과 후세에 증거가 될만한 일이라 하겠다. 공의 족후손(族後孫), 동식(東植)이 세월이 가면 이 사실이 묻혀 버릴까 염려하니 나에게 명(銘)을 부탁한다. 내 늙고 병들어 붓을 잡을 수가 없는데 나의 벗 조 연길(趙淵吉)이 편지를 보내 또 부탁함으로 참아 사양하지 못한다. 다음과 같이 한다. 효도란 모든 행실의 근원、 공은 진실로 부끄럽지 않네 孝源百行公實無愧 어떻게 그럴 수 있겠나、 하늘에 받은 성품 온전히 하였기 때문이라네 養兼志躰禮以葬祭 내 쓰러질까 두려워 이 명(銘) 새겨 세우게 하노라 曷以爲然獨全民彝 余懼沉泯揭此銘辭 금성(錦城) 오준선(吳駿善)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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